여기 오월이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.
그 사람은 우리에게 슬퍼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믿습니다.
종종 궁금해하기도 합니다.
오월에 슬퍼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오월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요.
또 고민합니다.
자신은 오월에 서 있던 적 없는데 슬퍼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요.
썩은 몸과 비명들 사이에서 영혼으로 남아 있어 본 적 없는데
고통에 대해 아는 바 없이 마치 모든 걸 이해하는 사람처럼 위선적으로 굴고 있는 건 아닌지.
여전히 오월의 이야기가 분분한 시점에서 당사자가 아니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
고통 없이 이야기를 할 자격이 주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.
이렇게나 당사자성을 고민하고 있었으면서 광주에 가 보지도 않았다는 걸 문득 깨달았습니다.
직접 걸어 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지, 당혹스러운 웅성거림이 마음을 타고 내달렸습니다.
광장에 서서 산 사람들을 수없이 지나치며 산 사람들이 쓴 글을 생각했습니다. 지금 여기의 수많은 존재들과 공명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살아있는 글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. 죽은 사람이 쓴 글도 공명하는 지금, 글을 쓰는 존재들이 산 사람들과 스쳐 보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. 닿아 본 적 없는데 무슨 말을 쓰겠다는 거지.
있는 척 좀 해 보겠다고 방에 핀 곰팡이 냄새를 썼을 때,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.
'너 이 냄새 맡아 본 적 있어? 네가 아는 걸 적어야지'
닿아 본 적 없는데 무슨 말을 쓰겠느냔 질문은 사실 저를 향한 것이었습니다.
산 사람들 사이에 서서 여태까지 쓴 글들을 되돌아보았을 때, 쪽팔렸거든요.
내가 아는 걸 적어야지. 이런 건 다 들켜.
모든 순간을 모든 인간이 겪어야만 말을 할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닙니다.
하지만 적어도 스스로의 세계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글을 쓰고 그 의문은 자신의 세상을 넓혀 본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모순에서 출발합니다. 나의 살아있음은 타인의 살아있음과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. 쓰는 인간은 그런 순간들을 뱉어냅니다. 모순을 받아들이고 의문을 한 방향으로 귀결시키거나 또는 여러 갈래로 나누며 그 갈래 속에서도 교집합을 찾는 것. 그것이 그 사람의 글에 내내 쓰인다는 것.
그걸 깨달은 순간 결심했습니다. 나는 올해 오월, 반드시 광주에 가야겠다.